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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추억 속 이야기, 그 속의 나의 꿈.

 

 

 


 

무슨 패기와 배짱이 었을까?

 

지금껏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체고에 진학중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다.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픈 기억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체고에서 '수영'이라는 운동을 하다가 부모님의 이혼 후

운동을 그만 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누나와 자취를 하게 되었다.

 

1학년 말에 내가 전학간 곳은 '휘문고등학교'였다.

학구열이 가장 심한 강남 그중에서도 대치동에 위치해 있는 휘문고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누나와 학교 앞 5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서 자취를 하였다.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하며, 주중에는 기숙사 생활에 타지에서 시합을 나가고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이른 나이부터 집밖을 나와서 생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지방에 계신 어머니와 떨어져 누나와 지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운동만 해오던 내가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잘하는 학구열 높은 강남에

휘문고등학교로 전학을 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지방에 있는 체육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휘문고로 전학을 친구들 모두가 놀면서도 공부를 했다.

 

수업시간에 잠을 잔다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운동만 한답시고, 기초학문에 소홀히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과외라는 것도 어머니께 부탁하여 내 딴엔 '고액과외'를 해보았다.

일주일에 두 번, 수학선생님이 오셨고, 일주일에 두 번 영어선생님이 오셨다.

 

과외를 해도 도통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진다.

 

나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이왕 학력수준이 다른 친구들 보다 미달이니

내가 못배워도 친구라도 잘 사귀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사실 지금도 내 수학실력은 형편이 없다.

그런데 이과에 진학하니 '미분, 적분'에 물리까지

화학 원소기호도 외우지 않았던 내가 수업을 앞으로도 2년 더 듣는다는 것은

'생 고문'과 같았다.

 

누나는 미용학과가 있는 전문대에 다녔었다.

내게 '강남 원장들은 모두가 남자다.'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끈기가 없고, 귀가 얇은 나는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해보지 하면서

어머니께 미용학원을 끊어달라 하고, 그 즉시 하교하면 곧바로 미용학원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위질과 마네킹 머리에 롤을 말았다.

 

결국에 필기시험도 혼자 공부해서 합격하고, 실기만 보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참, 국가시험에는 운이 좋은 것 같다. 60점 이상만 점수를 맞으면 되므로 나는 항상

턱걸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미용 국가 자격증'이 없다.

왜냐면 실기 시험을 몇일 앞두고 어머니와 양아버지께서 내게 외식업을 같이 하자고

내게 말씀을 건냈다.

 

그때도 역시 귀가 얇았던 나는 '그래 부모님도 외식업에 종사하시는데 나도 외식업을 하자'며

다짐을 하고 목표를 '강남 헤어샵 원장에서 외식사업가로 목표가 전면 수정되었다.'

 

친구들 모의고사 문제를 풀 때, 하교 후 열심히 학원에 다니며 수능을 준비할 때

나는 정말 외로웠다.

 

공부의 진도도 따라잡지 못했고, 해야하는 의욕도 잃었고, 말하자면 모두가 핑계이다.

그때는 정말 공부가 싫었다. 해도 안된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

사실은 진정으로 해보지도 않고, 피하기만 하면서 내스스로 핑계거리를 만들었다.

 

정말 외로웠다.

학교 끝나면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매월 1일이면 용돈이 들어오는데 그때 코엑스에서 원하는 의류를 구입하고

압구정동에서 일본의류를 사 모으는 것이 낙이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그때부터 독서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코엑스 옷집 매장보다도 코엑스 안에 있는 '반디앤루니스'가 더 편안했고

좋았다.

 

대형 서점은 정말 고요하다. 매 월마다 주기적으로 반디앤루니스에서 책을 구매했다.

친구들 수능공부할 때 나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고 있었다.

 

때로는 어휘를 몰라 '남규'라는 친구에게 뜻을 물어보기도 했다.

'대국굴기', '위인전', '재테크 서적', '자기계발 서적' , '인문고전' 등 수능과 관계 없는 것들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나는 지금도 하루에 밥은 거르더라도 책은 꼭 읽는다.

왜 읽는지는 모른다. 그냥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내 진짜 공부는 '대학에 진학 후' 시작되었다.

 

남들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ACE (고승덕 변호사의 말 인용)

내 스스로 공강이 나면 대학 중앙도서관의 계단 닳도록 오르락 내리락 했다.

 

책도 많이 빌렸다. 읽을 책이 많아도 대출 권 수가 '세 권'인데

나는 항상 '세 권'을 채우며 대출을 했다.

 

지방대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배웠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차를 몰고 학교를 통학하였다.

 

이유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 때는 내가 시장도 보고, 강의 끝나고 집에 오면

가게 일도 돕고, 때로는 가게에서 일하는 식구들도 출퇴근 시켜야 했다.

 

나는 대학다니면서 마음 편하게 대학로에서 술을 늘어지게 마셔본 적이 거의 없다.

강의가 끝나면 바로 가게로 돌아와 집안 일을 도왔다.

 

기름값이 정말 아까워서 강의 시간에 항상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신입생시절에 친구들 서로 같이 강의시간을 맞추며 시간표를 만들 때

나는 혼자 다녔다. 공강이든 강의가 끝나면 내게 여유로운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난 생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50여명 남짓하는 과에서 일등을 했다.

 

정말 기분 최고였다. 뭐든 처음이 무섭지 한 번 하게되면 다음부터는 욕심이 생긴다.

3학년 1학기 때까지 줄곧 1등이었다.

 

지금도 나는 TV를 시청하지 않는다.

무조건 책을 우선시 여긴다.

 

책이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

당당히 말하건대 나는 둔재다. 본명은 천재영이지만 결코 천재가 아니다.

나는 항상 남보다 뒤떨어지는 둔재였다.

 

그러나 명심하라!

"천재는 자만하는 순간, 노력하는 둔재의 들러리가 된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노력하는 둔재가 천재들의 인문고전을 만나게 되면, 자만하는 천재는 평생

노력하는 둔재의 들러리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천재가 될 것이다.

남들이 머리가 좋아서 20 번 하면 나는 200 번 시도할 것이다.

그게 내가 깨닳은 노력하는 둔재가 자만하는 천재를 따라잡는 유일한 길이다.

 

"휘문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교실 교단에서 친구들 앞에서 말했다. 10년 후 난 세계가 알아주는 외식사업가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친구들 앞에서 말 한 약속을 한 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자주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친구들이여...

그러나 우리 각자의 길에서 노력하여 꼭 정상에서 만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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